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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무휴(年中無休)展

갤러리 와부, 경기문화재단지원

2016년 12월 15일

참여작가: 곽진영, 김지영, 무소식(이은지+서현진), 박창규, 엄태신, 이승희, 정서영, 정선욱, 정선주, 정훈, 허정원

주최: NNR
기획: 정선주

고대 그리스 신화 중 시지프는 깨어있는 자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고통을 반복해가는 운명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현재를 살아가는 예술가 역시 저 너머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모색하는 일상을 반복하는 부분에서 동일한 존재인 것 같다. 요즘 흔히 회자되는 예술과 노동, 그 가치의 향방에 대한 논의 중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쉼 없이 창작의 굴레 안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연중무휴 드로잉展_리아트파크청평원 컨테이너스튜디오1,2 및 리아트카페_2016연중무휴 드로잉展_갤러리 와부_2016


전시 참여 작가들은 자신들을 쉬지 못하게 하는 상태, 즉 연중무휴의 상태에 들어가게 한 작업 키워드를 10월 리아트파크 청평원의 드로잉 전시와 12월 갤러리 와부의 연중무휴展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 정선주



이승희_여전히 거기에 머물다_한지에 아크릴채색 드로잉, 라이트박스_72×60cm×4_2016이승희_Must Have Item_I DO_태블릿 펜으로 드로잉, 백릿 필름, 라이트박스_80×80cm_2016이승희_30일간의 작업일지 30day by-product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6


본인에게 예술이란 내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기록의 수단이다. 나는 늘 내가 머물고 있는 집단을 관찰자의 시선을 바라본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작업의 공통된 내용은 어느 집단에도 완벽하게 속하지 못한 나의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하고 기록한다는 것이다. / 학업을 위한 지방에서 서울로의 이동은 새로운 집단 안에서의 안락함과 급변한 문화 안에서의 이질감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 익숙해질 즈음 다시 일본으로의 이동은 이방인의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하게 하였다. 지금도 한 곳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여전히 서울과 울산 그리고 익산을 오가야 하는 환경 속에서 느끼는 서로 미묘하게 다른 감정들을 주변과 교류하면서 아직도 나는 아직도 관찰자로 머물러 있다. 이러한 관찰자의 시선에서'틀림'이 아닌'다름'의 인지를 가로막고 있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 고민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정보의 수용을 배제하고 소통에 의한 수평적인 구도에서 주변의 사건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작업은 늘 그것을 통한 실재에 대한 고민의 기록이다. / 일상적 사물에 대한 취향과 선택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Must have Item」은 이 같은 의문을 가지고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의 허상을 맹목적으로 따라 하는 소비사회의 모습을 풍자한 초기의 작품이다. 이후 「기억의 정원, 2011」과 「기억의 집, 2014」「기억의 충돌 2016」은 스스로의 눈을 통해 직접 보았다는 이유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영상을 아무런 의심 없이 사실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하여 제작한 작업들이다. 이 같은 관점은 코끼리를 더듬는 맹인의 시선과 같다. 커다란 코끼리를 더듬어 그 형상을 그려나가는 맹인은 자신이 만져본 감각으로 코끼리의 형상을 상상한다. 맹인이 손을 더듬은 위치에 따라 그들이 상상하는 코끼리의 그 형상이 제각각 인 것은 어쩔 수 없듯, 우리가 살아가는 동시대에 대해서는 모두가 맹인과 같다. 시대의 징후를 읽어낼 뿐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정보의 공간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세계의 공간적 개념을 작품화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이 단지 관념의 차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이승희



정선주_너는 포지티브를, 나는 그 네거티브를 소비한다._디지털 프린트, 오브제_가변크기_2016


만지고 구입하고 고칠 수 있는 '만들어진 사물 working-thing'로서의 작품. / 집단적 의식이 들어있는 '미적 대상 aesthehetic object'으로 발현되는 작품. / 이 두 개의 명제는 아직도 내 머리 속을 부유하며 서로 부딪친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도 여러 개의 집단 즉 커뮤니티를 작동시키며 적지 않은 실험을 하고 있다. 커뮤니티를 하나의 예술적 대상으로 활용한다는 비판적 시각에서 겨우 벗어난 지점에서 나는 좀 더 확보된 자율적 사고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 이 작업은 9월부터 11월 까지 작동시킨 세 개의 커뮤니티를 통해 수합한 오브제를 시각화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약 29명의 일반인이 나와 함께 작업하며 소통하였다. 그들은 '소리'라는 주제로 폐가구를 활용하여 오브제를 만들었고, 일련의 날짜가 적힌 동그란 나무 디스크는 그 네거티브이다. / '소통과 참여'라는 키워드는 예술가를 창작에 집중하기보다 움직이고 말하고 듣게 한다. 어쩌면 자신의 움직임과 말과 소리에 집중하기도 빠듯한 우리에게 동시대 예술가의 길은 고단한 노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 "나의 작업에 소요되는 노동을 네가 한다. 너는 완성된 사물(포지티브)을, 나는 그 네거티브를 소비한다. ■ 정선주



김지영_reality01, reality02, reality03_스텐실_104×199cm, 62×129cm, 80×199cm_2016


한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창밖에 곰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아이의 눈에는 창 밖에 커다란 그림자가 곰으로 보인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눈에 그것은 그저 무언가의 커다란 그림자일 뿐이다. 어린 아이와 어른의 가장 큰 차이점이 '인지하고 있는 한계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은 자신이 살아 온 경험에 비추어 살아온 날 중 겪었던 일들을 '가능한 일'로, 겪지 못했던 일을 '일어날 수 없는 일'로 구분한다. 반면에 아이는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판단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아이들은 항상 어른들로써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상상해 내곤 한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있어 창밖의 곰은 실재하는 형상이며 실제보다 더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이다. / 이전의 작업에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로망'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고 다녔다. 사람들의 '로망'에 대해 들으면서 나는 그들이 그 로망을 갖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내가 보기에도 '유치한' 나의 로망들과 너의 로망들을 그리게 된 계기이다. 어쩌면 사실, 나는 애쓰며 지키고자하는 내 어린 시절의 꿈, 그것을 잃어버린 타인에 대한 호기심 혹은 그런 타인이 나로 비춰 보이는 그 불안감에 다시금 로망을 꿈꾸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나의 작업은 / 언제부터인지 이제는 기억이 잘 안날 정도로 아주 어렸던 날에... / 무작정 화가가 되고 싶었던 내게 쏟아진 눈빛을 애써 직시하지 않았던 나를 위해... / 그리고 지금, 여전히 그 눈빛들을 견뎌내야만 하는 어른인 나를 위해 애쓰고 있다. ■ 김지영



서현진_존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45cm_2016이은지_샹들리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5×97cm_2016


무소식(이은지+서현진) ● 무소식은 전시를 위한 프로젝트 그룹이다. NNR은 항상 꿈을 키우고 있는 신진 작가들을 지원하는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작동하고 있다. 이들은 올해 샹들리에를 소재로 작업을 진행해왔다. 비록 이 작업들이 자신을 표현하는데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선배 예술가로서 NNR작가들은 이들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다. ■ NNR그림 속 샹들리에는 아직은 불이 켜지지 않은 나를 의미한다. 나만의 깊숙한 곳과의 연결된 지점을 찾지 못해 아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음이 어쩌면 당연하고 어쩌면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한다. 삶의 여러 가지 색들 중에 본능적으로 선택하게 된 하나를 추구하며 살아갈 때. 어느 순간 우리는 불이 꺼진 샹들리에를 마주대하며 다시 처음에 대한 상념에 빠지게 된다.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어두운 상태를 인지하며 각자의 욕망과 낮선 자신을 질책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무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어둠 속 존재이지만 발화하는 빛을 가진 존재를 욕망한다. ■ 서현진처음에는 무척 설레는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아크릴을 칠하고, 칠하면 칠할수록 탁해지고, 자꾸 색은 비게 느껴지고, 난 분명 노랑색을 만들었는데 캔버스 위에는 황토색이 칠해져 있었다. 게다가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아서 몇 시간동안 색만 만들기도 했다. 장시간동안 앉아서 작업을 하니 눈이 빠질 듯 시렸고, 몸이 점점 부는 것을 보아 내 몸은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그린 것도, 이색과 저색을 섞으면 이렇다는 것도, 밤을 새워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무언가 희열을 주는 느낌이 무척 좋았다. 그에 더해 내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고 전시를 한다는 것이 행복하다. ■ 이은지



정선욱_한달 삼십일 아흔끼니_조합토, 흑유_150×220cm×6_2016


작업은 그 공간에 의해 결정지어지기도 한다. 나는 조합토를 소재로 코올링기법으로 작업을 하는데 이 역시 공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한 증거이다. 코올링은 낭비되는 흙 없이 최소한의 공간에서 효율적인 작업을 진행하는데 용이하다. 대중이나 다중을 모티브로 유닛작업을 진행해온 지난 전시와 비슷한 맥락으로 연중무휴 전에서도 유닛 작업이 진행된다. / 한 달, 서른 날, 아흔 끼니. / 예술가에게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은 작업에 대한 생각의 결과물 즉, 마침표를 찍어주는 행위이다. 하지만 진정한 작품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닌 생각의 과정으로 결정되고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작업은 한 달간 나의 작업에 대한 생각의 궤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선형 코올링은 하루에 한 끼니를 먹듯 나의 생각을 꾸려나간 흔적이다. 작업에 대한 생각은 연중무휴 쉬지 않고 돌아가지만, 비슷한 생각들이 약간씩 다른 나선형의 형태로 보여주듯 반복된다. 마치 작업에 대한 커다란 맥락 안에서 다양한 변칙들이 무수히 영향을 주고 빠져나가는 연속선처럼 말이다. 그것은 오늘의 작업과 내일의 작업이 비슷하지만 다르게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한 달간의 기간을 빼곡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중 폐기된 30~40점의 오브제는 마치 그날의 숙제를 끝내야만 하는 집요함으로 재생산되었고, 결국 완성된 아흔 끼니의 오브제를 배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보여주는 결과물은 여든 네 끼니로 전시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완성되었다고 모두 쏟아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정선욱



박창규_빨간망토_펜_71×56cm_2013박창규_숲 속_드라이포인트_35×86cm_2016


"그림에서는 얼굴을 비추지 않고 등을 돌려 뒷모습을 보이는 소년 혹은 소녀가 나온다. 그는 숲속의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무엇의인가의 시선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작품 속에서는 뒷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초점이 맞춰져있다. 숲속을 바라보는 모습 어떤 탑 뒤에 숨어있는 모습. 나무 위에앉아 있는 모습.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모습. 그림속의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관객의 모습일수도 작가의 모습일수도 마음속의 누군가가 떠오를 수도 있다. 어서 다른 길을 찾아라. 현실적이냐? 돈벌이는 되니?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현실의 안주.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삶. 인간은 현대 사회에서 무수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을 과감하게 변화시키게 된다. 내 삶이 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메카니즘 속에 말려들어 지배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작업을 통해 내가 현실에서 받는 답답한 느낌과 억압, 부담감을 풀어낸다. 그리고 그림 속 망토 입은 모습의 '그'를 통해 나의 일상을 투사해본다. ■ 박창규



허정원_The shining night_캔버스에 유채_60.6×72.2cm_2016허정원_The black night_캔버스에 유채_60.6×72.2cm_2016


깜깜한 밤 / 깜깜한 집 / 깜깜한 방에서 / 까만 물이 흐른다. 깜깜해서 까만 물이 보이지 않고 / 까맣게 탄 까만 마음도 보이지 않고 / 까만 심장도 / 까매진 뇌도 보이지 않기를 기도한다. / 모든게 깜깜해서 다행이다. 한 순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흐릿해지고 사라지지만, 사람들의 상상속 기억은 실재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답다. ■ 허정원



엄태신_vending machine & work of art_폐목재, 스프링_18.4×126×15cm_2016엄태신_눈맞춤, ing(eye-contac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20cm_2016


동전을 넣고 드르륵 드르륵 회전시키면 상자안의 물건중 하나가 랜덤으로 내 손에 들어온다. 문구점 밖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장난감 자판기의 이야기 이다. 이 작업은 '예술작품을 자판기에서?'라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공공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휴지자판기의 형식을 빌려 작품 자판기를 제작하였다. 일상에서 시각예술작품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는 이러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음악회나 공연을 보기위해 어떤 행위와 대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거리의 조형물이나 전광판을 보지 않는다. 조형물 즉, 시각예술은 입체적이든 평면적이든 디지털적이든 일상 속에서 일종의 노력 없이 소비된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소비된 시각예술이 끼치는 영향은 개인의 취향과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나는 이 작업에서 쉽게 간단하게 소비할 수 있는, 하지만 일정한 노력으로 얻어져야 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 부작용: 과자 자판기는 동그란 철스프링이 돌아가면서 사이에 끼어있는 과자를 판매하는 방식인데, 간혹 철 스프링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더 사게 만들거나 그 뒤에 뽑는 사람을 편애(...)하는 경우도 있다. / 상대방과 눈을 맞추는 행위는 사회적 상호 작용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라고 이야기한다. 눈맞춤을 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보이는 특성은 상대방과의 사회적 상호 작용이나 의사소통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기도 한다. / '입'이 없는 캐릭터 / 말로는 모두 전달될 수 없는 '의미'..., / 곁눈질 하는 '눈' / '소통'과 '소통의 부재'의 간극 / eye-contact 주제로 한 시리즈 작업은 나의 모습을 대변함과 동시에 현대인들의 소통의 부재를 표현하고 있다. ■ 엄태신



곽진영_Reflection_캔버스에 유채_53×65.1cm_2015곽진영_Memory Compilation1, 2_장지에 안료, 염료_45.5×65.1cm, 50×72.7cm_2016


사람은 참 감사하게도 관념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서,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설명하지 않고 특유의 관점과 편견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현상에 접근한다. 관념은 무수한 요소들에 의해 사람마다 다르게 형성되는데, 그것이 고착되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밭에 물을 대면 움푹 패인 고랑에만 물이 고이고 흐르는 것과 유사하게, 생각은 길이 난 곳으로만 흘러서 그 길을 더 깊고 좁게 패이게 만든다. 시간의 축적과 함께 길이 나 버린 사고 구조는 촘촘히 짜여 있는 직물처럼 상당히 견고한 것이어서 그 위에 새로 새겨지는 정보는 틀에 맞게 삭제되거나 덧붙여진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내재된 편집기능에 의해 선택되고 버려지는 것들이 많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의 경험이 투영된 기억 속의 장소나 사건을 마치 본질인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 잔잔한 물의 표면에 비친 형상과는 다르게 심하게 일렁이는 물의 표면에 난반사된 형상은 때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다. 마찬가지로 감정으로 인해 동요된 마음의 물결에 비친 상은 시시각각 일정하지 않고 왜곡되기에 그 대상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 "반영"이라는 뜻을 가리키는 단어인 Reflection에는 공교롭게도 생각, 사상이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 우리의 기억은 결코 날 것이 아니며, 사고 구조와 감정의 동요가 뒤섞여 생성된 혼합물이다. 때론 골똘히 해독(解讀)해야 할 대상이다. 나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작용인 기억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안료를 종이 표면에 얇게 쌓거나 물리적으로 긁어내어 종이에 '길'을 내는 일,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물과 안료를 '고이게' 하는 일, 형성된 화면에 결코 온전하지 않은 대상과 그 반영을 새기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담는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길을 낼 것인지 혹은 반영을 얼마나 더 일그러지게 그려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내 기억의 원본성에 대한 의문과 사고방식-이를테면 늘 하던 대로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관점을 개척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관객들에게 있어서도 해석에 관한 한 모든 것이 유동적이지만, 자신의 해석이 이번에도 이미 길이 나 버린 사고방식의 결과물이 아닌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 곽진영



정훈_Time's_청자토, 분청토, D-1 백토, 모네가든유, 재유, 연잎결정유_110×80cm×125_2016


시간이란 인간이 만든 틀인 동시에 그 안에 인간이 들어 있다. 이 시간은 불변하며 예외의 시간 구조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틀 안에서 스스로 시간 구조를 만들어 내어 자기 고유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시간'이라는 형이상학적 중심으로 진행된다. 흙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작업의 물질적 특성들의 변화에 작업을 맞춰 나가기 때문이다. 시간의 틀 안에서 작업을 하고 만들어지는 작업이 내 시간의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궤적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 준다. 각 작품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 즉 정해진 틀의 한정된 시간에서 개인의 시간들이다. 개별적인 계획들은 전체 시간의 영역에 한정된다. 서로 비슷한 계획들도 각기 다른 상황들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계획이 모여 작업이 진행되고 조립됨으로 하나의 일상이 된다. 영상에서는 지나간 현실들의 중첩, 시간의 흐름에 대한 역전을 보여 준다. 또한 파편적 시간들을 조립함으로 작업의 연속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각 영상은 내가 작업 하는 과정의 일부이면서 각 계획들을 실행 하면서 하는 창작의 유희와 고민들을 동시에 보여 준다. 작업을 위한 드로잉, 도자 작업, 프레임 작업 등 한 가지 유형의 작업이 아니라 복합적인 작업을 통하여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을 완성해 간다. 이는 나의 과거의 족적과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작업에 관한 예고편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결국은 5분이라는 시간 안에 하나의 작업을 하는 과정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반복되어진다. ■ 정훈



정서영_work_디지털 프린트_120×190cm_2016


고도로 산업화 된 사회에서 꿈을 고르라고 한다면 노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건축가 혹은 디자이너의 심혈을 기울인 구상 안에는 환호할지라도 시공자의 노동력과 기술은 건축가의 생각을 실현시키는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직접 건축 일을 경험하니 그러한 생각들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구상 안이 없다면 일을 시작도 할 수 없겠지만, 노동력이 없다면 구상 안 또한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메모도 작업'을 해야 한다. 이 작업은 거푸집(형틀)을 붙이기 전에 바닥의 수평을 동일한 높이로 맞춰주는 작업이다. 먼저 레벨기로 기둥 혹은 벽이 세워지는 곳의 바닥의 높이를 측정한다. 그 후 낮은 곳의 바닥에 '메모도'라고 이름 붙여진 작은 합판들을 깔아서 높이를 맞춰준다. 단순해 보이는 작업이지만 필수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 작은 합판이 있어야 할 곳에 없이 벽체 혹은 기둥을 세우려고 콘크리트를 부었을 때 메모도 자리로 콘크리트가 새게 되고, 자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거푸집(형틀)이 터지게 된다. 또 거푸집(형틀)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폼핀, 거푸집 사이의 간격을 유지시키는 타이핀 그리고 거푸집이 터지지 않게 막아주는 파이프를 고정시키는 다대걸이와 같은 것들이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빠진 요소가 있는 벽체 혹은 기둥 하나가 다 망가져 버린다. 작은 부품이라도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 그리고 그런 일의 가치를 아는 것. 스스로 그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노동은 나에게 가치 있고 즐겁고 필요한 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결국에 완성되는 '그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은 부품과 작은 요소들이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지만 제자리에 있게 하는 노동력으로 의미를 찾아가고 결국에는 건물이 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은 완성시키는 힘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 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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